몽환적이고 감각적 화풍…"그녀는 작은 태양이자, 큐비즘의 성녀"

입력 2023-03-09 16:53   수정 2023-04-26 12:10


“나는 언제나 직업을 갖고 싶었다. 사르트르를 알기 훨씬 전부터 글을 쓰고 싶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자신만의 삶을 성취해야 했다. 내가 생각하는 성취란 무엇보다 일을 통해 얻는 것이었다.” 현대 여성 해방의 상징이 된 프랑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의 이 말은 프랑스 화가 마리 로랑생(1883~1956)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로랑생은 남성 중심의 미술계에서 화가라는 직업을 선택해 성취감을 이뤄낸 극소수의 여성 예술가 중 한 명이다.

20세기 초 시각예술 분야에서 창조는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여성은 창작 활동에서 배제됐다. 로랑생은 여성의 창조적 재능을 억압하던 시절인 1902년, 파리의 미술교육기관 아카데미 앙베르에 입학해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곧 앙베르에서 피카소와 함께 입체주의(큐비즘)를 창시한 화가 조르주 브라크를 만나 친구가 됐다.

로랑생의 예술적 재능을 높이 평가한 브라크는 그녀를 전위예술가 그룹의 중심인물인 피카소에게 소개했다. 로랑생은 피카소의 작업실인 세탁선(Bateau-Lavoir)에 드나들며 진보적 예술가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얻었다. 또 20세기 혁명적 예술운동인 입체주의의 유일한 여성 화가로 여러 전시회에 참가하며 경력을 쌓았다. 1913년 여성 화가로는 이례적으로 미국 최초 국제현대미술전시회인 아모리 쇼의 참여 작가로 뽑히는 영광도 누렸다.

입체주의 이론을 정립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1912년 로랑생의 작품에 관한 첫 번째 평론을 발표하며 이런 찬사를 바쳤다. “그녀는 행복하고, 착하고, 영적이며 많은 재능을 가졌다. 그녀는 작은 태양이고 여성적인 형태의 나 자신이다. (중략) 그녀는 큐비즘의 성모다.” 연인관계인 두 사람은 1907년 피카소의 소개로 만나 약 5년 동안 창조적 협력자로 서로의 예술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로랑생은 아폴리네르의 명시 ‘미라보다리’를 탄생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로랑생은 입체주의 남성 화가들과 교류하며 단체전도 열었지만, 놀랍게도 주류 남성 작가의 표현 양식을 따르지 않고 여성적 감성을 강조한 독창적인 화풍을 선보이며 차별화를 시도했다. “몽마르트르의 뮤즈”라는 남성들의 찬사보다 예술가로서의 동등한 지위와 독립성, 예술적 평가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남성 화가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바로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성과 따뜻함, 사랑스러움을 강조하는 화풍을 개발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내가 왜 죽은 생선, 양파, 맥주잔을 그려야 합니까? 여자가 훨씬 더 예뻐요”라는 로랑생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두 여성의 키스 장면을 그린 이 그림은 로랑생 화풍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한눈에도 여성 화가가 그렸다고 느껴질 만큼 주제와 형태, 색채에 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풍부한 감성, 온화함이 가득하다.

파스텔 톤의 파랑, 분홍, 연보라, 회색조의 몽환적이고 감각적인 색감과 흐릿한 윤곽선, 부드러운 곡선을 사용해 두 여성의 정서적 친밀감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비평가들은 로랑생이 개발한 우아하고 세련된 장식화풍을 “섬세한 큐비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여성 특유의 분위기가 감도는 로랑생 화풍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도 전해진다. 이 초상화의 모델은 여성 의복에 혁신을 가져온 프랑스 출신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이다. 두 여성은 러시아의 공연 제작자 세르주 디아길레프가 만든 발레단 뤼스의 의상과 공연세트 디자인 작업을 하던 인연으로 만났다. 샤넬은 인기 화가인 로랑생에게 초상화를 의뢰하고도 자신과 닮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림 인수를 거부했다. 왜 초상화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을까?

샤넬은 “나는 전 세계에 옷을 입혔다. (중략) 내 손으로 직접 만든 세상의 중심이 되고 싶었다”고 말할 정도로 도전적이고 영웅적 면모를 가진 강인한 여성이다. 그런데 초상화 속 여성을 보라. 무릎에 포메라니안 강아지를 앉히고 오른팔을 머리에 기댄 나른한 자세를 취한 채 몽환적 상태로 앉아 있다. 벌거벗은 어깨와 반쯤 드러난 젖가슴은 관능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샤넬이 초상화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지만 로랑생은 그림을 수정하지 않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소장했다. 작품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오랑주리 미술관에 기증됐다.

로랑생은 “나를 열광시키는 것은 오직 그림이며, 그림만이 나를 영원히 괴롭히는 진정한 가치”라는 자신의 말을 평생에 걸쳐 실천했다. 회화에서 무대 디자인, 벽지와 직물 디자인, 책 삽화, 시집 출간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확장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20세기 초 격동적 예술혁명기에도 우아하고 세련된 여성적 화풍을 창안한 로랑생은 1956년 파리에서 73세로 사망했다. 입체주의 운동을 옹호했던 프랑스 시인 앙드레 살몽은 “새로움을 창조한 이 시대의 위대한 발명가”라며 로랑생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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